반미주의자 모랄레스 대통령 당선… 인디언 출신으로 국민들 지지 높아
볼리비아 대통령 당선자 에보 모랄레스가 12월 22일 대통령궁을 방문,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 벨체 대통령과 만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한 사람에게도 쩔쩔매던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번엔 에보 모랄레스라는 또다른 강적을 만났다. 12월 18일 치러진 남미의 볼리비아 대통령선거 개표 결과 사회주의운동당(MTS) 모랄레스 후보(46)가 55%에 근접하는 득표로 호르헤 키로가 후보(28%)를 두 배 가까운 차이로 누르고 볼리비아 첫 인디언 출신 대통령이 됐다.
‘볼리비아의 체 게바라’라고 불리는 모랄레스의 대통령 당선은 모랄레스가 표현한대로 미국에는 ‘`악몽’이다. 1825년 볼리비아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지 180년 만의 첫 인디언 출신 대통령이 되는 모랄레스는 줄곧 ‘반미, 반세계화, 반제국주의’를 표명해왔다. 더군다나 아직 볼리비아가 남미 빈국 가운데 하나지만 볼리비아와 모랄레스의 저력은 베네수엘라와 차베스 못지 않다.
예상대로 모랄레스는 19일 열린 당선 기자회견에서 부시를 ‘세계의 유일한 테러리스트’라고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이와 반대로 ‘자존심과 주체성을 잃지 않고 사는 법을 보여준 카스트로에게 감사한다’며 미국과 대치하고 있는 쿠바의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을 치켜세웠다. 모랄레스는 또 ‘볼리비아와 중남미 지역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고 공언, 카스트로· 차베스와 함께 ‘반미·반제국주의 삼각편대’의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처럼 힘이 있다. 그는 2003년 코카 재배 합법화와 에너지 국유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이끌어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등 불도저같이 밀어붙이는 힘이 있다. 당시 산체스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이를 반대하는 소수 백인 엘리트 그룹에 대항해 원주민이 봉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원주민 농민층과 ‘동지적 관계’
모랄레스의 이러한 힘은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것처럼 볼리비아 국민의 지지에서 나온다. 그의 주요 지지기반은 볼리비아 중부의 코카 재배 농민을 중심으로 한 농민층과 인구의 50%를 차지하는 인디언 원주민이다. 메스티조(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까지 포함한다면 원주민계 국민은 무려 85%에 달한다. 이들은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정했지만 여전히 원주민어를 사용하며 모랄레스가 이번 선거에서 받은 55% 가까이 되는 지지가 이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와 코카재배농·원주민의 관계는 거의 ‘동지적인 관계’다. 모랄레스 스스로가 코카재배농 출신이고 인디언이다. 그가 2003년 시위를 주도하며 ‘원주민 봉기’를 주장했던 자신감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모랄레스가 1인당 국민소득이 900달러선으로 남미의 농업빈국인 볼리비아에서 빈농 출신이라는 점도 그의 장점이다. 빈농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의 정치적 주장이 과격할 정도로 개혁적일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다.
모랄레스의 학력은 고등학교 2학년 중퇴(11학년)가 전부다. 그의 형제는 모두 6명이었지만 4명은 어려서 죽었다. 그의 가족은 1980년대 먹고살기 위해 코카재배 지역으로 이주, 코카재배농이 됐다. 그는 1993년 코카재배조합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999년에는 에너지의 국유화, 코카재배의 합법화를 내건 사회주의운동당을 창당, 당수로 취임하며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2002년 그가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 미국은 코카재배농 출신인 모랄레스가 당선되면 볼리비아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동안 미국은 친미정권들을 지원, 볼리비아의 마약단속프로그램을 시행해왔다. 그러나 미국의 그러한 발언은 코카재배농과 원주민의 단결을 불러 오히려 모랄레스 지지도를 높였다.
코카는 미국인에게는 마약인 코카인의 원료로 알려져 있지만 안데스 산지의 원주민들은 ‘신이 준 나무’라고 생각한다. 원주민들은 잉카 시대부터 코카 잎을 씹어 피로와 배고픔을 잊었다. 이들은 잉카의 신을 표현할 때 양손에 코카 잎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표현해왔다. 모랄레스가 코카재배 합법화를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 즉 제국주의가 인디언들의 전통까지 간섭한다는 것이다. 모랄레스가 당선 기자회견에서 ‘코카재배의 전면 합법화’가 아닌 ‘국민과 재배농의 투표를 통한 통제 정책’을 주장한 것도 코카를 재배해 마약을 만드는 것은 금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후보가 지난 10월 광산촌을 방문, 광부 차림으로 유세를 하고 잇다.
풍부한 천연자원이 ‘믿는 구석’
모랄레스에게 또다른 힘은 볼리비아의 천연자원이다.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경제 대국인 미국과의 대립에서 한발도 밀려나지 않는 이유는 풍부한 석유 때문이다. 볼리비아에도 석유와 가스가 많이 매장돼 있다. 특히 가스는 베네수엘라에 이어 남미에서 둘째로 많은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가스와 석유들은 대부분 다국적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모랄레스가 에너지 부문의 국유화를 요구하며 2003년 시위를 주도했을 때 국민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볼리비아는 식량이 부족한 것이 자주적인 경제를 꾸려나가는 데 가장 큰 약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미국가들에 최근 들어 볼리비아와 같이 좌파 성향의 정권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는 점은 대통령이 된 모랄레스에게 행운이다(표 참조). 남미의 좌파정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미국을 배제한 남미 경제블록 결성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것도 모랄레스에게는 좋은 출발신호로 여겨진다.
미국이 모랄레스 당선 이후를 겨냥, 인접국인 파라과이에 미군을 파견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는 있지만 어찌됐든 또다시 버거운 상대를 만나게 됐다. 볼리비아의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소수 백인계의 ‘뒤집기 한 판’만 팔짱끼고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 중남미는 좌파의 메카 볼리비아 대통령선거에서 좌파 후보인 에보 모랄레스가 당선됨에 따라 중남미 국가 중 좌파 정권이 들어선 국가는 7개국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중남미 좌파화 경향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세계화정책이 중남미를 빈곤의 악순환으로 몰아넣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세계에서 열리는 반세계화 시위의 `주력부대’가 중남미와 아시아인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내년에는 이 지역에서 10개국이 대통령선거를 치른다. 현 좌파 집권 7개국이 안정 궤도에 들어설 경우, 이들 10개국 대선에서도 좌파정권이 속속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아래는 중남미 좌파 집권 7인. 
(왼쪽부터) 룰라 다 실바, 타바레 바스케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우고 차베스, 피델 카스트로. _브라질 루이스 아니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 (2003년 집권) |
<국제부/윤성노 기자 ysn0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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