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우리의 ‘밥맛’은 어디서 왔을까

일제강점기 때 일본품종 보급으로 전통 재래종 쌀 자취 감춰

민족의 명절 설이다. 설은 전통의 상징이다. 전통은 그저 고래(古來)의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면서도 새로운 것이 추가돼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역사사회학자 E.P.톰슨은 이 전통은 발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근래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이른바 ‘만들어진 전통’론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먹을거리는 어땠을까. 우리 조상이 먹었던 밥과 반찬은 과연 지금과 같았을까. <주간경향>이 그 역사를 되짚어봤다. <편집자 주>

벼 익는 풍경은 대표적인 고향의 상징이다. 그런데 여기 심어져 있는 쌀들의 고향은 어디일까. 지난해 10월, 누렇게 익은 이삭들이 철원의 들녘을 메우고 있다. | 김석구 기자

“조선사람들의 식사법 중에서 눈에 띄는 결함은 그들이 식탐(食貪)을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동양사학자 W.E. 그리피스가 1906년에 낸 저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 나오는 식습관에 대한 묘사다. 그리피스는 “적어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빈부나 반상(양반이나 평민) 간에 전혀 다름이 없으며”, “잔치의 평가는 음식의 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양에 있다”고 적고 있다.

조선사람들은 언제든지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식사 때가 아니더라도 일단 먹을 것이 있으면 있는 대로 먹어치우려고 한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피스의 책에는 평범한 조선인이 어느 정도의 밥을 먹는가도 언급되어 있다.

“노동자 한 사람이 보통 먹는 양은 쌀 1쿼트 정도인데, 이것으로 밥을 지으면 그 용량은 매우 많다. 그러나 그가 먹을 수만 있다면 그 양의 2~3곱이라도 먹어 치우려는 그의 식욕을 막을 수 없다.” 고체일 경우 1쿼트가 4홉 8작 정도이기 때문에 한 끼 식사에 반 되가량의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는 말이다. 환산하자면 대략 700~800g의 쌀인데, 지금의 성인 용량 3~4배의 밥을 먹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도 1900년대 초의 사진들에 찍힌 조선사람들이 살찐 경우는 별로 없다. 그리피스의 관찰은 사실일까.

1백년 전 조상들은 식탐이 문제였다?
음식사학자인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사실 우리나라가 빈곤했기 때문에 먹을거리가 풍부한 나라라고 볼 수가 없다”며 “문헌학적으로 고증이 가능한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영양섭취의 대부분은 반찬보다는 밥이었을 가능성이 많았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먹는 밥 양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주식은 밥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세 끼를 먹는 습관이 확립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1일 2식, 즉 아침 저녁을 먹는 것이 일반화된 식사였다. 대개 한 끼 식사는 밥과 국·김치 정도였다. 과학저술가인 이종호 과학기술연구원 장기자문위원은 “아마도 두 끼 식사가 확립된 것도 몇 백 년 안되었을 것”이라며 “보통은 아침만 먹고서 일하는 형태가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어쨌든 더 깊숙이 들어가보자. 조상들은 그렇다면 어떤 밥을 먹었을까. 조상들이 먹었던 밥맛은 어떤 맛이었을까. 짓는 방법만 밥맛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품종의 쌀로 지은 밥이냐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안남미라고 불렸던 쌀이 있다. 쌀알이 길쭉하고 찰기가 없어 불면 밥알이 훌훌 날아가는 쌀이다. 6·25 전쟁 후 구호물자로 베트남에서 가져왔던 쌀이다. 지금은 국내에서는 거의 볼 수 없고, 동남아 등지에 가면 볼 수 있다. 역시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 권장되었던 통일벼라는 품종의 쌀도 있었다. 냉해 등에 강하고 낱알이 많이 열리는 다수확 품종이다. 하지만 밥맛이 없어 지금은 일부 가공용 혹은 사료용으로만 재배되고 있을 뿐 밥상에서는 완전히 퇴출되었다.

추청쌀은 어떻게 한국 전역에 퍼지게 됐을까
지금의 한국사람들이 먹는 쌀의 대부분은 추청쌀이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개량품종이다. 속칭 ‘아끼바레’라고 불리는 이 쌀은 1960년대 일본에서 들어왔다. 지금은 동진쌀 등 개량품종에 1위의 자리를 넘겨줬지만, 한때 한국의 식탁을 장악했던 쌀이다. 어떻게 이 쌀은 퍼지게 되었을까. “1965년인가 들여와서 처음에는 주로 경기도 김포 지역에만 심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당시 경기도 지역에는 통일벼를 심기에 맞지 않는 지역이 있었고, 거기에 심었던 것이 추청이에요. 사실 추청쌀이 품종이 좋은 건 아니었어요. 당시 통일벼가 수량은 많이 나는데, 밥맛이 떨어지니까 ‘경기미의 대표’로 인식되면서 살아남은 겁니다.” 최해춘 박사의 말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식사를 하고 있는 조선사람들.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뎅이 1905년 출간한 <조선에서(En Coree)>에 실린 사진이다. 그릇의 내용물은 보이지 않지만 밥그릇이 크고 1~2개의 반찬을 놓고 식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리하자면, 통일벼로 지어 ‘떨어지는 밥맛’ 때문에 추청쌀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그는 쌀품종 연구의 권위자다. 농진청에 근무할 당시 <쌀을 알자>라는 제목의 두 권짜리 책을 펴냈고, 최근에는 관련 연구를 집대성한 <벼와 쌀>이라는 1000쪽짜리 책을 관련학자 70여명과 함께 냈다. 그는 덧붙였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먹는 쌀의 품종이라는게 대부분 일본 품종끼리 교배해서 나온 것이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쌀’로 인식하는 것들 대부분은 엄밀히 말해 우리 쌀이 아닌 것이다.

한국의 재래종 쌀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일제 지배 때문이었다. 1906년에 설치된 ‘대한제국 권업모범장’은 오늘날 농촌진흥청의 모태다. 권업모범장은 1907년 대한제국 정부로 이양되었지만, 경영방침은 통감부의 지침을 그대로 따랐다. 한일병합이 이뤄진 후에는 조선총독부 산하의 식민지 농정을 담당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초창기 권업모범장이 조사한 재래종 논벼와 밭벼는 1451종에 달했다. 단적으로 경기지방에는 노인벼, 자체벼, 소하벼, 붉은벼, 이리벼 등이 있었고, 전라도 지역에는 팥벼, 흰벼, 쌀벼, 해남벼, 지리벼, 은모레기찰, 모록찰 등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쌀 품종 기록은 이전에도 있었다. <산림경제지(山林經濟誌)>(1682)에는 36종의 쌀 품종이,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에는 68품종이 기록되어 있었다. 품종 조사 등 근대적 벼 육종 연구가 목적이라지만 실제 이 기구가 수행한 작업은 한반도 토양에 맞는 일본 품종을 들여와 이른바 우량품종이라는 이름으로 개량하는 일이었다. 처음 보급된 일본산 품종은 조신력, 곡량도, 다마금 등이었다.

‘산미증산계획’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우대형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원은 “일제가 보급한 것이 이른바 ‘우량품종’이었다는 것은 맞다”고 말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1910년대 보급률이 2~3%밖에 안되는 일본 품종이 1920년대 한반도 남부지방의 경우 70%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 일본은 모범 답이라고 해서 농민들을 견학시키는 등 자신들이 가져온 품종을 적극적으로 심게 만들었다. 여기에 당시 일본사람들이 들여온 우량품종은 물과 비료가 필요했으므로 동시에 관개수리사업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거기서 생산된 쌀을 먹는 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이 아니었다. 쌀은 환금작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쌀을 파는 대신 보리밥을 먹었다. 일제강점기 말부터 해방 이후 한동안 봄철은 그 보리마저도 끊겨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하는 ‘보릿고개’를 경험하기도 했다.

재래종 쌀 품종의 ‘단절’과 ‘부활’
<산미증산계획>이 본격화되면서 일본 품종은 1940년대에 이르면 전체 재배 면적의 90%까지에 이른다. 우 연구원은 “아무래도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들여온 품종은 당시 조선사람들의 입맛보다는 일본사람들의 입맛에 훨씬 더 맞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재래종 쌀은 어떻게 되었을까? <쌀밥전쟁>의 저자 김환표씨는 “조선을 강제 병합한 뒤 일제는 조선을 식량기지화하려는 정책을 썼다”며 “이건 개인적인 추측이기는 하지만, 쌀을 증산하는 과정에서 다수확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조선사람들이 먹기 좋았던 쌀이 뒤로 밀렸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 박사는 “당시 일제는 육종 소재로 활용할 유전자원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재래종에 대해 조사를 했지만 극히 일부의 재래종을 제외하고는 육종 소재로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로 인해 전통적으로 조상들이 먹어온 쌀의 품종도 ‘단절’된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 재래종의 유전자원은 상당수가 종자 증식과 보존과정에서 망실되었고, 그나마 미국, 일본, 그리고 국제벼연구소에서 보존 중인 한국재래종(274품종 451점)을 다시 도입한 것이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맛있는 밥’이라고 말하는 기호 역시 일제시대 이후 일본사람들의 입맛을 기준으로 변해버린 것은 아닐까. 홍하철 국립식량과학원 답작과 농업연구관은 “지금 일본에서 밥맛 좋은 품종으로 꼽는 쌀이 ‘고시히까리’라고 하는데, 그것이 만들어진 것도 1956년이었다”며 “6·25 때 구상나무가 크리스마스 트리 용으로 반출돼 개량되어 전세계에 퍼져나갔던 것처럼 일부 사학자들은 일본 쪽의 벼품종은 우리나라 재래종을 가져가서 개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제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 박사는 “물론 한국의 재래품종이 키가 크고 병충해에 약한 면도 있었고, 벼 알에 긴 까락이 있는 등의 단점이 있지만, 벼 이삭이 커서 이삭 당 벼알 수가 많고 또 한발에 강한 동시에 성숙일수가 비교적 짧고, 물이 부족한 천수답에서 발아력이 강한 것 등 강점도 있다”며 “때문에 지금까지는 벼육종에 별로 활용되지 못했지만 정밀한 재평가를 통해 유용한 육종소재를 개발하고 활용하면 환경스트레스에 강한 저항성을 가진 우량한 품종을 개발하거나 우리 입맛에 맞는 고품질 쌀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