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의 토크쇼-심야 토크쇼 생중계 중 벌어진 끔찍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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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블레어 위치> 이후 신생 하위 장르-파운드 푸티지-에서 더 이상의 혁신은 나오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 이 코너에서 이 장르 작품들을 리뷰하면서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찬란

/찬란

돌이켜 보면 1970년대는 뭔가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때였다(어린 시절 기억을 곱씹어보면 낙엽이 뒹구는 우중충한 가을 오후 풍경이 왠지 먼저 떠오른다). <악마와의 토크쇼>는 그 뭔가 불길하고 칙칙한 1970년대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 공포 영화다.

잭 델로이는 심야 토크쇼 <나잇 아울스(night owls)>의 진행자다. 영화에서 실제 경쟁 프로그램으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2019년 세상을 떠난 자니 카슨이 진행하던 장수 심야 좌담 <투나잇 쇼>를 떠올리면 될 듯싶다. 한국판으로는 <주병진 쇼>나 <자니윤 쇼>처럼 화제의 명사를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끔은 가수가 나와 노래도 부르고 콩트도 하고 그런.

델로이의 고민은 <나잇 아울스>가 경쟁 프로그램에 밀려 만년 2위에 그친다는 것이다. 부인이 폐암으로 죽고 프로그램에 복귀했는데 여전히 성적은 신통치 않다.

만년 2위 심야 토크쇼의 핼러윈 특집

1977년 10월 31일, 델로이와 제작진은 회심의 특집프로그램을 마련한다. 핼러윈 특집이다. 출연진은 영매 크리스투, 그리고 그의 속임수를 ‘폭로’할 현직 마술사 카마이클 헤이, 여기에 곧 출간할 신간 <악마와의 대화>(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를 쓴 초심리학 박사 준과 ‘리글씨(Mr. Wriggle)’라는 악마가 빙의된 소녀 릴리. 원래는 재즈 가수 한 명도 출연해 이 심야 쇼에서 마무리 공연을 할 예정이었는데 어떤 ‘사고’로 그 가수는 출연하지 못했다.

영화는 “전 국민을 경악케 했던 생방송 사고의 마스터 필름과 미공개 영상을 입수해 공개한다”며 시작한다. 그렇다. 이 영화는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1998) 이후 공포 영화의 하위 장르로 확립된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장르 영화다. 어떤 파국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을 기록한 영상자료를 뒤늦게 발견 내지는 공개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얼개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띠지만 당연하게도 실제 사건은 아니고 창작한 내용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 지상파에서 방영된 영상의 무편집본인 것처럼 능청을 떤다. 아,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1970년대라는 점을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1980년대 한국 꼬꼬마들의 TV 채널 선택권이 KBS1·2, MBC밖에 없었던 것처럼 미국도 1970년대 후반까지 CBS, NBC, ABC 등 지상파가 채널을 장악하고 있었다.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는 NBC의 간판 프로그램이었고, 델로이의 <나잇 아울스>는 같은 시간대 가상의 방송국 UBC에서 방영 중이었다.

영화의 절정부는 소녀 릴리가 악마 리글씨에 빙의된 모습을 보여주면서부터다. 회의주의자 카마이클 헤이가 프로그램의 제작진과 준 박사, 릴리가 짜고 청중과 시청자를 기만하고 있다며 제작진에게 최면을 걸어 온몸에서 벌레가 튀어나오는 환각을 보여준 뒤다. 릴리/리글씨는 괴력을 발휘해 스튜디오를 공포에 몰아넣는다. 결국 결코 방영돼서는 안 됐을 파국이 벌어진다.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가능성

영화의 각본이나 연출은 영리하다. 시청률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제작진의 초조함, 재계약을 앞둔 진행자 델로이의 강박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브플롯이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카메라에 눈을 맞추는 주인공의 어색한 행동은 코미디이기도 하면서 이 모든 것은 연출에 불과하다는 ‘소격효과(낯설게 하기)’를 뒤집어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여기에 1970년대 특유의 불온한 공기와 분위기를 영화는 공포 장르라는 프레임으로 훌륭하게 포착해놨다.

돌이켜 보면 <블레어 위치> 이후 이 신생 하위 장르-파운드 푸티지-에서 더 이상의 혁신은 나오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 그동안 이 코너에서 이 장르 작품들을 리뷰하면서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마 장르 내에서는 오랫동안 기억되고 언급될 작품이 나온 것 같다.

제목: 악마와의 토크쇼(Late Night with the Devil)

제작연도: 2024

제작국: 오스트레일리아, 아랍에미리트

상영시간: 93분

장르: 파운드 푸티지

감독: 캐머런 케언즈, 콜린 케언즈

출연: 데이비드 다스트말치안, 잉그리트 토렐리, 로라 고든, 조지나 헤이그, 페이샬 바지, 이안 블리스, 리스 오테리

개봉: 2024년 5월 8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수입: 찬란, ㈜에이유앤씨

배급: ㈜올랄라스토리

공동제공: 소지섭, 51k

영화 속 회의주의 마술사의 실제 모델은

/제임스 랜디 교육재단

/제임스 랜디 교육재단

영화에서는 마술사 카마이클 헤이의 경력은 스쳐 지나가듯 언급된다. “워렌 부부에게 아미티빌의 귀신들린 집을 같이 검증하자고 제안했으나 워렌 부부가 나오지 않았다.” 흥미로운 대목이다.

영화 <아미티빌의 저주>(1979)의 모델이 된 ‘흉가’는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서포크 카운티에 진짜로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호기심으로 내비게이션을 찍고 다녀온 방문 인증 사진 같은 것이 꽤 나온다. 원작 소설과 영화의 성공으로 어쨌든 사람 살 데는 아닌 듯싶은데, 지금도 멀쩡하게 사는 가족이 있다고 한다.

워렌 부부는 앞서 이 코너에서 리뷰한 <컨저링>, <애나벨> 시리즈의 실제 주인공이다. 미국 코네티컷에 있는 부부 집 지하실에는 실제 오컬트박물관이 있다. 영화처럼 험상궂은 인상은 아닌, 다소 귀여워 보이는 ‘진짜 애나벨’ 인형이 “절대로 열어보면 안 된다”는 경고문과 함께 유리상자 안에 얌전히 앉아 있다. 그렇다면 초능력자나 영매들의 사기를 폭로하는 마술사도 실존 인물일까.

아마 회의주의(skepticism) 운동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카마이클 헤이가 누구를 모델로 했는지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제임스 랜디. 실제 영화가 주로 참고했을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에 자주 출연했다. 1984년 한국을 찾아 전국에 ‘숟가락 구부리기’ 열풍을 일으킨 초능력자 유리 겔러와 앙숙이었다. 겔러가 어떻게 관중을 기만하고 사기를 치는지 폭로한 <유리 겔러에 관한 진실>(1982)이라는 책도 썼다. 겔러와 랜디의 ‘충돌’은 <투나잇 쇼>에서 절정에 달했다. <투나잇 쇼> 측은 겔러의 출연을 앞두고 랜디의 충고를 받아 겔러가 쓸 소품을 자체적으로 준비하고, 겔러와 그의 조수들이 붙어 있지 않도록 했다. 그러자 겔러는 컨디션 난조를 호소하며 초능력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폭로가 계속되자 겔러는 1991년 랜디와 그가 이끄는 회의주의단체에 1500만달러짜리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했고, 1995년에는 소송비용을 물어내라는 판결을 받기도 했다. 랜디는 2020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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