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호가 만난 사람] “100만원 결혼식은 자선 캠페인”

홍콩 최고의 라이프스타일리스트 박영숙 크리스틴갤러리 대표

갤러리에 들어서자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우산을 놓을 곳도 마땅찮았다. 우윳빛 대리석 바닥과 사방을 둘러친 하얀 벽이 거북스러웠다. 화려한 색조의 그림을 배경으로 테이블과 콘솔, 안락의자 등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전문가의 안목을 빌리면 ‘프랑스 낭만주의 스타일’의 공간이다. 이런 곳에 비를 맞아 누추한 행색으로 들어섰으니 호화로운 궁전에 굴러들어 온 걸인 꼴이다.

홍콩 최고의 라이프스타일리스트로 불리는 박영숙 크리스틴갤러리 대표와의 인터뷰는 그가 손수 꾸민 갤러리 안에서 이뤄졌다. 그의 갤러리는 그 자체가 작품이다. 단순히 미술품을 전시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가구 배치, 테이블 세팅, 꽃 장식, 푸드스타일링 등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라이프스타일’이란 묘하다. 같은 공간이라도 물건을 어떻게 놓고 꾸미느냐에 따라 느낌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 집에다 수억·수십억원을 들이고, 명품을 입고, 먹는 데 돈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부를 이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운 환경과 격조 높은 생활을 보장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에겐 라이프스타일 문화가 빈약하다. 라이프스타일리스트나 리빙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이 생소하게 들리는 까닭이다.

꽃으로 장식돼 작품처럼 보이는 소파에 가방을 놓고 역시 꽃과 초, 와인 잔, 과일을 담은 접시, 실버 커트러리 등으로 세팅된 테이블 가의 하얀 커버를 씌운 의자에 앉았다. 은은한 조명이 비치고 서유석의 ‘가는 세월’이 경음악으로 흘렀다. 열린 공간이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박 대표와 마주앉고 보니 가정집 거실처럼 아늑했다. 신기하게도 들어올 때의 어색했던 느낌이 잦아들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뷰티스타일리스트나 푸드스타일리스트라는 말은 들어 봤는데 라이프스타일리스트라는 말은 잘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게 없었죠. 사실은 제가 아티스트라는 걸 전혀 몰랐어요. 주위 분들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닌데 무슨 아티스트냐고 반문했죠. 만지는 것마다 예술이라는 거예요. 미술·음악·인테리어·패션·무용을 다 좋아하고, 직접 연출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니까 종합예술이잖아요. 그러니까 라이프스타일리스트라고 부르는 거죠.”
박 대표는 미국과 유럽, 홍콩 상류사회를 상대로 격조 높은 미를 추구하는 라이프 아티스트로 불린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평범하던 주변이 환상처럼 변한다고 한다. 언론은 그를 ‘놀라움과 기쁨, 감동을 안겨 주는 마법의 소유자’ ‘홍콩 상류사회 여인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여자’라고 표현한다.

어떻게 해서 라이프스타일리스트의 안목과 감각을 지니게 됐습니까.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주로 갔어요. 32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을 시간이 없을 정도였어요. 너무나 세상이 아름답기 때문에 지구를 몇 백번 돌면서 그걸 눈에 다 집어넣었어요. 꽃을 만졌다 하면 내 작품이 되고, 그림을 사면 그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더라고요. 제 눈에는 그런 것만 들어오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부터 예술을 추구하고 노력한 게 한꺼번에 복사된 것 같아요.”
박 대표는 1979년 25세의 나이에 캐세이퍼시픽항공사에 입사해 12년 동안 승무원 생활을 했다. 전남 순천 출신인 그는 수도여사대(현 세종대)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대학원 재학 중 삼촌의 권유로 무용과 교수가 되기 위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발레학교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그는 박영숙이란 이름 대신 ‘크리스틴 박’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갖게 된다.

무용을 했는데 어쩌다 스튜어디스가 됐습니까.
“한국무용을 하다가 발레를 하려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무엇보다 언어가 되지 않았고요. 또 샌프란시스코는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냥 바다만 쳐다봐도 눈물이 저절로 나요. 고향 생각이 나고 외로워서 못 있겠더라고요. 언어학교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과 시애틀을 거쳐 로스앤젤레스로 갔어요. 거기에는 한국 사람이 많으니까요. 그러다 비자가 만료돼 한국에 돌아왔는데 적응이 안 되는 거예요. 이미 물이 든 거죠. 주위에서 홍콩에 가면 서양 같지도 않고 제 적성에도 맞을 거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늦은 나이에 비행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죠.”

승무원 생활이 적성에 맞았던 모양이죠.
“제가 가장 좋아한 곳이 프랑스였어요. 가면 많이 울어요. 2주에 한 번 꼴로 영국 지사에 묵는데 시간이 아까워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바로 파리로 떠나요. 샤를드골공항에 내리면 알랭 들롱이 막 나타날 것 같고…(웃음) 센 강을 바라보면 기도가 저절로 나와요. 벌써 30년 전의 일이네요.”

센 강을 보면 왜 기도가 나오는 거죠. 무슨 기도를 합니까.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죠. 제가 무엇이건대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은 혜택을 주시느냐고요. 홍콩 재벌 부인들이 제 직업을 가장 부러워했어요. 가고 싶은 나라에 가서 사고 싶은 물건을 다 사니까요.”
박 대표는 파리를 비롯한 세계 도시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흡수하고, 음식을 맛보고, 자기 나름대로 변형해 재현해 보았다. 그렇게 키워 온 안목으로 월급을 모아 마음에 드는 예술품을 수집했다. 당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플로리스트였던 미셸 로보 등 파리의 예술인들과 교유하며 최고급 인테리어 감각도 익혔다.

선천적으로 미에 대한 안목과 감각이 있었군요.
“선천적이라기보다 비행 생활을 하면서 후천적으로 노력을 많이 한 거죠. 미를 추구했고, 기어코 (미로써)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상류사회보다 제가 원하는 게 예술이었어요. 그런데 (비행 생활을 마감하고) 홍콩에 도착하니까 이미 상류사회가 제게 접근을 한 거예요. 상류사회를 오래 보다 보니까 저절로 제가 만졌다 하면 상류사회가 좋아하는 게 되는 거죠.”

상류사회를 꿈꾸고서….
“아니에요. 상류사회보다 제가 원하는 게 예술이었어요. 그런데 (비행 생활을 마감하고) 홍콩에 도착하니까 이미 상류사회가 제게 접근한 거예요. 상류사회를 오래 보다 보니까 저절로 제가 만졌다 하면 상류사회가 좋아하는 게 되는 거죠. 여기(크리스틴갤러리)가 원래 시멘트 바닥이었어요. 그걸 30분 왔다 갔다 하면서 붙인 거예요. 먼지 툴툴툴 털어 가지고….”
1988년 미국 하버드대 출신 중국계 미국인 변호사와 결혼한 뒤 1991년 승무원 생활을 접은 그는 라이프스타일리스트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름도 ‘미세스 크리스틴 추’로 바뀌었다. 홍콩의 각종 대연회나 국가 귀빈 행사의 대부분이 그의 연출로 이뤄졌다. 테너 호세 카레라스 등 세계적 거장을 초청해 자선 공연도 자주 열었다. 2006년 한·프랑스 수교 120주년 기념으로 열린 프랑스 홈페어에 초대받아 그림·꽃·가구전을 선보이기도 했다.

상류사회에서 활동한 데에는 남편의 힘도 작용했습니까.
“남편을 통해 미국 공화당 총수라든가 대통령 고문변호사 같은 정치인을 많이 알게 됐어요. 제가 내조를 잘하니까 남편이 저를 로비스트로 앞장세운 거죠. 미국 정치인들은 저의 내조하는 모습이 좋았던 모양이에요.”

수백억원대의 대저택을 소유할 정도로 큰 부를 축적한 과정이 궁금합니다.
“1991년에 한국의 거물 인사가 홍콩에 저택을 구한다고 했어요. 제가 솜씨가 있다는 게 홍콩 상류사회에 알려져 있으니까 저한테 그런 부탁을 해 온 거죠. 맨 꼭대기에 전망이 좋고 수영장이 있는 단독주택이어야 한다고 했어요. 어쨌든 구해 놨는데 성사가 안 돼서 제가 샀어요. 없는 돈을 모아서 샀는데 그게 터닝포인트가 된 거예요.”

박 대표께서 집을 사서 인테리어를 하고 꾸미면 하루에 1000만원씩 올랐다고 하던데, 정말 그랬습니까.
“1000만원이 아니라 신문에는 2500만원 오른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저는 투기는 절대 안 해요. 제가 살 집을 사서 아이를 위해 꾸민 것이니까요. 부동산 전문가가 저를 많이 따라다녀요. 집을 팔면 즉시 저를 인터뷰해요. 다음에 집을 어떻게 살 거냐고 물어요.”
박 대표는 처음 산 저택을 1996년에 팔았다. 남편을 돕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세계에서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아름다운 집’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남편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다가 43세의 늦은 나이에 인공수정을 통해 아들을 얻었다. 아이가 너무 귀해 집을 새로 꾸미고 가정부를 5명이나 두었다고 한다. 그만큼 아들은 그의 꿈이자 희망이었다.
예술적 안목으로 수백억원대의 부를 쌓은 그는 2007년 6월 재산과 꿈을 한꺼번에 잃는 날벼락을 맞는다. 사업차 일본과 한국에 갔다가 홍콩으로 돌아온 그는 집에 들어갈 수도, 아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가 아들을 위해 정성들여 꾸민 200억원대의 저택은 다른 사람 소유로 넘어갔고, 아들에 대해서는 법원의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저는 집을 판 적도 없고 이혼한 적도 없어요. 남편이 15년 전부터 제 이름을 도용했고, 의사·판사와 짜고 교묘하게 사기를 친 것이죠. 남편은 동성연애자예요. 19년 동안 가짜로 살았어요. 19년 동안 저를 처녀로 살게 하고 마지막에 법적으로 강간을 한 거죠. 제 변호사가 19년 결혼생활의 고통을 계산해 남편을 상대로 최고 300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상태예요.”
이 사건은 홍콩 언론이 대서특필하면서 국내에도 알려져 있다. ‘홍콩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아들 찾기 위해 외롭게 소송 중’ ‘드라마 같은 크리스틴 박의 삶’ 등의 제목으로다. 집에서 막 샤워를 마친 박 대표가 경찰과 법원 집달관에 의해 알몸인 상태로 검은색 담요에 싸여 경찰서로 실려 가는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그는 “전 남편의 주도면밀한 범죄와 홍콩의 로펌, 법원, 의사, 경찰 등의 거대한 커넥션에 결코 굴하지 않을 것”이라며 3년째 법적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 고통을 겪던 중인 2008년 크리스틴재단을 설립했더군요.
“영국의 유명한 로펌에서 10여 년 동안 저의 자선활동을 지켜보다가 재단을 만들어 준 것이에요. 제가 큰 자선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런 재단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런데 그 사건을 겪은 뒤에 법이 너무너무 무서워 제대로 활용을 못하고 있어요.”
박 대표의 자선활동은 유명하다. 1998년 호세 카레라스, 류더화, 최성수, KBS교향악단 등이 참가한 북한 기아 어린이 돕기 콘서트의 준비위원장으로서 행사를 주도했다. 이혼 문제로 고통을 겪던 2009년 쓰촨성 대지진 때도 저택에서 바자를 열어 1000만 홍콩달러를 모아 이재민에게 기부했다. 지난 4월에도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옥상 하늘공원에서 아이티 난민 돕기 자선바자를 열었다.

자선활동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홍콩에서 교회에 열심히 다녔어요. 교회가 자선을 많이 하잖아요. 결혼하기 전인 1988년 한인회장 부인이 홍콩에 한인 국제학교가 없다며 도와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윤복희씨 등 가수 몇 명을 모시고 진도 크리스틴 갈라 쇼를 연 게 처음이었어요. 그때부터 자선이라는 건 일상적인 일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죠. 교회에 나갈 때 얼마 안 되는 월급이지만 항상 300달러(미화)를 가져간 거죠. 홍콩은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 때문에 거의 매일 선교사들이 거쳐 가는 곳이에요. 어려운 선교사가 있으면 헌금을 하게 됐죠.”

모금이 잘 되는 편이었습니까.
“자선을 하는 게 소문이 나서 큰일이 생기거나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긴급하게 저한테 찾아와요. 그래서 돈만 줄 게 아니라 상류사회 부인들을 대상으로 이벤트를 만들어 모금하는 쪽으로도 건 거죠. 홍콩은 영국 식민지였기 때문에 금방 모아져요.”

한국에 갤러리를 낸 까닭은 무엇입니까.
“다른 선택이 없었어요. 제가 모은 좋은 그림과 전 재산을 지난해 3월 다 빼앗아 갔다가 몇 달 뒤에 다시 찾아가라는 거예요. 안 찾아갔더니 버리겠다고 하더군요. 컨테이너로 20개 분량이 되는 걸 어디다 둡니까. 한국에 갤러리를 차리고 자선 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시작한 거죠.”

컨테이너 20개에 어떤 물건이 들어 있습니까.
“살림이죠. 그림도 정말 좋은 것은 다 없어졌더군요. 피카소 그림도 바꿔 놓고요. 한국에 안 가져온 그림도 많아요. 사실 전 너무 화가 나서 한국 박물관에 다 기증하려고 했어요. 그러면 우리 후손들이 영원히 보지 않겠어요. 그런데 친구가 말렸어요. 한국의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쓰는 것이 낫다는 거예요. 제가 하고 있는 ‘100만원 결혼식’도 자선의 한 방법이죠.”
‘100만원 결혼식’은 크리스틴갤러리를 통해 국내 활동을 시작한 박 대표의 첫 작품이자 그가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링’과 ‘자선’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캠페인이다. 그의 라이프스타일링은 화려하거나 돈을 많이 들이는 것이 아니다. ‘100만원 결혼식’은 100만원의 비용으로 멋진 결혼식을 연출해 주는 것이다. 수익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선’이고, 새로운 결혼식 문화를 추구하는 점에서 캠페인이다. 말하자면 ‘크리스틴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동호가 만난 사람

그런데 100만원으로 결혼식이 가능하겠습니까.
“한국에 와서 가까운 분들의 말을 들어 보니까 자식 결혼 때문에 고민이 많더라고요. 어떤 기사분한테 물었더니 5000만원 들었대요. 이번 아이티 난민을 위한 바자를 하면서 아이티도 좋지만 한국의 젊은 세대와 자식을 가진 부모들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20년 전에 제가 한 방식으로 하면 100만원으로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어요. 한 달 정도 준비했어요. 웨딩드레스와 부케, 하객 100명 기준으로 음식까지 계산해 봤어요. 실제로 100만원이면 가능해요.”
크리스틴 박, 크리스틴 추라는 이름에서 원래의 박영숙으로 돌아온 그는 한국에 ‘크리스틴 라이프스타일’을 심을 계획이다. 특히 실패한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고 한다.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그런 지혜를 얻을 수 있고 비결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